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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의 멜로디- 청화스님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09-04-02 10:25     조회 : 3937    
『우주의 멜로디』

주문이라는 것도 그냥 그렁저렁 말이 아닙니다.
다 빈자리에 있는 우주의 음(音)이며, 우주의 멜로디입니다.
실은 다 비어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실상자리인 진여불성은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자비, 지혜, 행복 또는 가장 청정한 범음(梵音)이 있습니다.
영원한 우주의 멜로디가 있단 말입니다.

‘옴마니반메훔’이나 광명진언(光明眞言)의 음(音)이나,
또는 대다라니나 모두 다 우주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냥 그것만 외운다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약간의 공부가 되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주문에 불과한 것이며, 참선은 못됩니다.

기왕이면 주문을 외우면서 참선을 하고 싶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면서도 참선을 하고 싶은 것이 우리 아닙니까?
“참선 공부는 제일 높은 공부이고, 다른 공부는 저 밑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 합니다.
‘나는 지금 관세음보살을 몇십 년 동안 해왔는데,
관세음보살을 안 외우면 내 마음이 허전하다.
그런데 참선도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자님들은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근본 자리,
근본 성품자리에다 마음을 두고 하시면 됩니다.
성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마음을 둘 것인가?
이것도 부처님 말씀에 우선은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비어 있지만, 단지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의 모든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다,
이렇게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상(相)에 안 걸립니다.

『금강경』을 몇 천 번 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금강경』도리의 핵심이 무엇이니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떠나는 것입니다.
또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우리 마음이 상에 걸리지 않고, 상이 없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는 좋은 것이 있고 싫은 것이 있다는 상을 두면
『금강경』도리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상은 본래 비어 있다,
이렇게 아시고서 ‘옴마니반메훔’을 외우시면,
주문을 하시는 것 자체로 참선을 하시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님이 저 밖 어디 계신다.
아미타불은 십만 억 국토 저 밖에 계신다.’ 하는 식으로 염불하면
그것은 그저 칭명염불(稱名念佛)인 것이지 참선은 못 됩니다.

또는 법성이고 불성이고 진여불성이고 다 없애 버리고
그냥 무자(無字 ) 화두나 ‘이 뭣고’ 화두만 들고 있으면 참선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화두라는 것이 어째서 나왔는가?
우리 불자님들은 화두나 염불, 또는 그 둘의 상관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이 투명해야 번뇌가 안 생기고 확신이 섭니다.

그러면 참선은 무엇이고 또 염불은 무엇인가?
이에 관해 뿔뿔이 생각하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어긋납니다.
둘이 아닌 법문에 어긋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실 필요 없는 논쟁들이 많습니다.

돈오돈수니 또는 돈오점수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보조국사 가신 지 팔백 년 세월 동안,
나옹(懶翁), 지공(指空), 태고(太古), 서산(西山), 진묵(震黙) 등,
여러 도인들이 다 옳다고 긍정을 했으므로 새삼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부질없이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지금 누구를 비방하자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은 모두 다 진실한 법문입니다.
깨달은 분들은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다 같습니다.
깨달은 분의 입장에서는 돈오돈수라고 말하든, 돈오점수라고 말하든
아무런 흠이 될 게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그릇 따라서 도인들은 그때그때 성품을 안 여의고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무자 화두나 이 뭣고 화두는 모두 다 근본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달마 스님이 서족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결국은 근본성품을 깨달기 위해서 오신 것 아닙니까?
‘여하시 불(佛)잇고?’
즉 부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기 위함인 것입니다.

대개 화두라는 것은 서쪽에서 달마 스님이 이쪽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또는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 따라서 나온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근본성품이 무엇인가,
근본성품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도인들이 상(相) 없이 그때그때 내뱉는 말이
무(無)가 되고 이 뭣고가 되고 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화두를 참구할 때도 우리 마음이 상을 떠나버린
진여불성 자리에 딱 입각해 있어야 됩니다.
그러는 것이지 진여불성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의심만 한다면,
상기(上氣)가 되고 공부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땅히 바른 철학,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가치관은 무엇인가?
불이법문이라, 일체 존재가 다 진여불성, 불심뿐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바른 가치관입니다.
우리 눈에는 명명백백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다 하더라도
이 모두가 참말로 바로 본다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있지 않은 것을 있지 않다고 분명히 보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참선 공부는 그냥 앉아서
이런저런 모양만 의젓하게 취한다고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다 털어 버려서 내 걸망에나 내 몸뚱이까지도 몽땅 다 비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을 하면,
용이 물을 얻어서 하늘로 올라가고,
호랑이가 언덕을 얻어서 천리만리 달려가듯
우리 공부도 나아가게 됩니다.

참다운 생명의 창조는 제법공 도리, 반야지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생명이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윤회의 법입니다.
‘있다, 없다’ 느끼는 그 마음을 일러
일승법(一乘法)에서는 도심(盜心)이라 했습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면, 그 마음은 도둑의 마음입니다.
또는 ‘이 집은 영구히 내 집이다.’ 하는 그 마음도
부처님 시각에서 보면 도둑의 마음입니다.
모두가 다 본래 비었습니다.
자기 몸뚱이든 무엇이든 자기 것이 아닙니다.

금생의 이 몸뚱이는 어디서 왔는가?
과거 전생에 이와 같은 몸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미래 내생에 이와 같은 몸이 있을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몇 십 년 동안 사는 이 몸뚱이는 분명히 있지 않은가?
이 몸뚱이도 찰나찰나 신진대사해서
어느 순간도 같은 공간에 같은 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정확히 새겨봐야 합니다.
어느 한 순간도 지금 이 몸이 똑 같은 형태로 있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몸은 한 찰나도 똑같지 않습니다.
찰나, 즉 75분의 1초 동안도 같은 몸은 없습니다.
신진대사해서 먼젓번 세포가 죽고 나중 세포가 생겨납니다.
사실은 매 순간 주름살이 더 깊어지는데,
우리 중생들은 몇 십 년 되어서야 늙었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그냥 내 몸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뚱이는 한 순간도 같은 몸이 아닙니다.
순간 찰나도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사실 내 몸도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법공인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제법공 도리를 알아야 참다운 대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승교는 그저 ‘있다, 없다’고 하는 차원의 유교(有敎)입니다.
대승이 되려면 적어도 제법공 자리, 반야지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반야지혜, 반야의 보배가 있어야 참다운 염불이 됩니다.
‘모든 것은 진여불성분이다, 다른 것은 다 헛것 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하면 그것은 바로 염불인 동시에
염불선(念佛禪)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