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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란 무엇인가?
  글쓴이 : 죽림사     날짜 : 04-02-14 10:31     조회 : 5170    
1.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불교는 깨달은 이의 가르침이며 깨닫게 가르치는 종교 입니다.깨달음은 왜 필요한가 하면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깨달음의 내용이 행복입니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고통 때문이며 고는 바로 영원치 못한 나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이 집착이 다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아집이 사라질 때 존재의 무상과 무아를 살필 수 있는 般若(지혜)가 생기고 그래서 고통의 씨앗을 끊을 수 있는 정진력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하여 매몰되지 않고 깨어있는 존재인 불타를 이루며, 영원한 행복인 적멸(寂滅)을 이루게 됩니다.
불교는 종교요, 철학이요, 과학입니다. 불교의 최고 경전인 화엄경은 신, 해, 행, 증(信,解,行,證) 사과(四科)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신은 신앙이니 종교적으로 신앙심을 발하여 대성 불타에게 귀의신봉 한다는 뜻이요, 해는 해오(解悟)이니 불타께서 설하신 법보장경(法寶藏經)을 철학적으로 연구 해석하여 오묘(奧妙)한 진리를 밝혀 깨친다는 뜻이요, 行 과 證은 수행하여 증득(證得)한다는 뜻이니 불타을 신앙(信仰)하고 불법(佛法)을 연구함과 동시에 부처님의 교법을 정신적, 과학적으로 실천 수행함에 따라서 불교의 최고 목적인 불과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불과(佛果)를 증득한다는 말은 불타 곧 대각자(大覺者)가 된다는 말이니 불타는 우주의 진리를 대각(大覺) 하였으므로 진리에 미혹한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에 미혹한 범부중생이 불타의 교화를 받아 불과를 성취하여 불타의 경지에 까지 도달하려고 하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그것은 오직 진아(眞我)를 발견함에 있다.

2.眞我를 찾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범부 중생은 진리에 미혹한 까닭에 진아당체(眞我當體)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직 망아(妄我)허망한 나, 소아(小我), 가아(假我)에 끌리어 한세상을 꿈속에서 속아 살다가 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적으로는 부처님을 믿고 철학적으로는 부처님의 법을 사색하며 과학적으로는 부처님의 교법에 의하여 심성(心性)을 수행함으로써 허망한 나 , 소아, 가아를 버리고 眞我를 발견하여 결국 부처님 같이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행복해지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我에 대한 관심이 크며 我에 대한 연구가 가장 필요한 것이다. 오직관심이나 연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 我 대한 수행이 절실히 요구되는 종교가 곧 불교이다. 옛날 중국의 혜초라는 화상이 선지에 유명한 법안, 문익(法眼, 文益)(법안종의 창시자)선사에게 [어떤 것이 부처 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사가 대답하기를 [너는 이 혜초 니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대답일까, 동문서답(東問西答)과 같이 생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원래 선지에 대한 문답으로 말하면 격외현지(格外玄旨) 곧 格밖의소식을 묻고 대답하게 되므로 각각 근기(根機)에 따라 자증자오(自證自悟) 할 뿐이다. 범부들의 사량(思量)과 분별로써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부처에 대한 해석은 교문에 널리 기록된바 있으니 혜초 화상도 역시 보통 상식적으로 해석되는 부처에 대한 지식쯤이야 없을 리가 없지요, 그러나 혜초 스님이 자기가 교문에서 얻은 지식으로 아는 부처만으로는 자기의 마음에 만족을 느낄 수 가 없으므로 선지에 유명한 법안 선사에게 물어 본 것이다. 법안선사도 혜초의 묻는 뜻을 잘 앎으로 부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여실히 드러내기 위해서 서슴치 않고 [너는 이  혜초니라.] 고 바로 대준 것이다. 그러나 선지에 대한 문답은 이정도로 하고 몇 말씀 더하고자 합니다. 원래 부처라 함은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마음의 본체인 영지각성(靈知覺性)이 드러남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우주의 만유(萬有)가 일시적인 인연 화합으로 인하여 천태만상의 현상을 드러내고 있지마는 그 실은 내용을 보면 어느 것 하나도 우리의 영지각성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할 수도 없다고 보는 것이 불교에서 보는 우주관이다. 비유(比喩)하면 물을 떠나서 물결이 있을 수 없고, 허공을 떠나서 삼라만상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지각성을 떠나서는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이 건립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심조만유(心造萬有)의 세계관(世界觀)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유형지대자(有形之大者)는 해야(海也)요, 무형지대자(無形之大者)는 허공이요. 유형, 무형을 초월하여 가장 큰 것은 心이라고 하셨다. 그 뜻은 형상 있는 것으로 가장 큰 것은 바다요, 형상 없는 것으로 가장 큰 것은 허공이다. 그러나 유형한 바다나 무형한 허공을 초월하여 그 보다 더 큰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승조(僧肇)大師는 [천지(天地)가 여아동근(與我同根)이요, 만물(萬物)이 여아일체(與我一體)라]고 하여 천지만물이 나와 더불어 동근일체(同根一體)가 된다고 하였으니 영지각성을 근본으로 한 천지만물이 과연 同根一體가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宋나라 시대 대문장 소동파(蘇東坡) 는 재승박덕이라 재주는 뛰어났으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형주고을에 있을 때 하루는 옥천사로 승호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사가 “대관절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동파가 “나는 칭(秤)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칭 가라니요” 승호선사는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소동파는 오만불손한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천하 선지식을 저울질하는 칭 가란 말이요” 그러자 승호선사는 “으악”하고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렇다면 이것이 몇 근이나 되지” 하고 물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또 한번 상총선사를 찾아가 정중히 설법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상총선사는 “어찌 무정설법(無情說法)은 듣지 못하고 유정(有情)설법만 들으려고 하는냐” 하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무정설법은 산천초목과 일체무정물이 설법을 한다는 말인데, 소동파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을 타고 한없이 달렸습니다. 자기가 잘났다는 오만한 생각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오직 텅 빈 마음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말을 달리던 동파는 마침 웅장한 폭포 밑에 이르자 귀가 번쩍 열렸습니다.
비로소 마음에 눈, 마음의 귀가 열린 것입니다. 
오도송(悟道頌)에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舌)이요,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이로다. 하였으니 그 뜻은 시냇물 소리는 곧 부처님의 설법 아닌 것이 없고, 산 빛은 곧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이라. 원래 동일한 물체라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과 같이 우주의 본체인 靈知覺性을 깨친 覺者의 혜안(慧眼)으로 본다면 불타의 眞身만이 부처가 아니라 장벽와력(牆壁瓦礫)과 일초일목(一草一木)까지도 佛心의 표현 아닌 것이 없다고 보지만은 진리에 미혹(迷惑)한 범부의 육안으로 본다면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가 구족(具足)하신 부처님의 진신(眞身)까지도 부처인 줄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육조대사(六祖大師)는 말씀하시기를 [자성(自性)이 미(迷)하면 중생이요, 자성을 각(覺)하면 불(佛)이라]고 하였으니 누구든지 마음이 미혹(迷惑)하여 자기의 근본인 영지각성을 알지 못하면 범부중생이 되는 것이요, 마음을 밝혀서 자기의 영지각성을 보게 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특히 선문에서 보는 불타관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하나 미혹하면 중생이요, 마음하나 깨치면 부처라고 하면 구태여 내 마음 밖에 따로 다른 부처를 찾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自性 佛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법안선사가 혜초 화상에게  [너는 이 혜초 이니라] 고 한 말씀도 결국은 [혜초는 혜초의 자성불을 찾으라]는 뜻도 되지마는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다른 부처를 찾지 말라 너 혜초가 곧 부처다.]라고 지적하여 부처에 대한 견해를 솔직하게 말씀하여 준 것이다. 또 옛날 어떤 스님이 귀종선사(歸宗禪師)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네게 말해 주고 싶으나 네가 믿지 않을까 한다.]고 하였다. 그 스님은 다시 말하되 [어찌 감히 和尙의 말씀을 믿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하고 공손히 대답 하였다. 그 때 에 선사는 그 스님을 바라보며 [곧 네가 부처니라] 고 말씀하였다. 그 스님은 그 말씀에 큰 깨침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타력문으로 들어가 타방불(他方佛)을 찾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요, 자력문(自力門)으로 들어 와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자성불(自性佛) 곧 영지각성(靈知覺性)의 주인공이 되는 眞我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구족하신 진상, 진락, 진아, 진정[眞常, 眞樂, 眞我, 眞淨]이라고 하는 열반(涅槃)의 四德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我가 존재하므로 我를 인정하게 되며 我를 주재(主宰)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아의 존재를 확실히 파악하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我를 我라고 주재하기도 힘 드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我가 진실로 我의 我라고 할 것 같으면 언재든지 我의 임의대로 我를 주재하며 동작할 수 있어야만 我에 대한 존재성이 확고하다 할 수 있으며 我에 대한 주재력(主宰力)이 충분하다고 인정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든지 보편적으로 체험해 보는 바와 같이 내 몸이 분명히 내 몸이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내 몸이 아니냐, 더구나 내 마음이 분명히 내 마음 이지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내 마음이 아니냐, [내몸],[내 마음] 분명히 나의 것 이지만 나의 임의대로 주재 할 수 없는 나의 존재, 알고도 모를 수수께끼 와 같은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냐, 더구나 백년 미만에 없어지고 마는 허망한 존재, 이것을 범부는 실아(實我)라고 보지마는 불교에서는 망아(妄我)라고 부른다. 그러나 범부중생이 이와 같은 妄我의 탈을 쓰고 속아 살면서 일생동안 오직 육신의 애욕에만 집착이 되어 갖은 죄악을 짓고 사는 妄我의 생활을 불교에서는 小我라고 부른다.
그런데 망아니 소아니 하는 我의 내용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면 육체적 조직은 지, 수, 화, 풍, 사대(地, 水, 火, 風 四大)가 일시적으로 가합(假合)하여 성립된데 불과한 것이요, 정신적 작용도 역시 육체의 동작과 아울러 지, 정, 의(知, 情, 意,) 삼방면으로 발현(發現)됨에 이지적(理知的)으론 진가허실(眞假虛實)을 알려고 하며 감정적(感情的) 으로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표현하고, 의식적(意識的)으로는 시비, 선악(是非, 善惡)을 판단하려고 노력하지마는 이것도 일시적인 현상으로서 고정불변(固定不變)하는 진실성(眞實性)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일시적인 인연의 가합으로 된 自我의 존재를 불교에서는 假我라고 부른다. 이 假我의 내용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연구해 보면 첫째 육체상으로 보면 유아(幼兒)로부터 소년, 청년, 장년, 노년에 이르기 까지 과연 어느 때를 眞我라고 인정 하겠는가, 우리는 갑자기 늙어 죽는 것이 아니요, 유아로부터 노년에 이르는 동안 일분일초도 똑같은 때가 없이 자주자주 변화하여 어느덧 모르는 사이에 늙어 호호백발(晧晧白髮)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가사 우리의 일생을 백년이라고 가정하고 출생한 날로부터 매일 사진 한 장씩을 찍어본다고 하면 백년 삼만육천일에 삼만육천장의 사진을 찍게 될 것이다.
그 사진을 가지고 비교해보면 매일매일 비슷비슷하게 변해가며 달라지겠지마는 그 중에도 소년시대의 사진과 노년시대의 사진만은 아주 딴사람과 같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와같이 달라지면서 같고, 같으면서 달라지는 동안에 어느덧 생로병사라는 무상고(無常苦)에 부딪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죽음의 나라로 가고마는 것이 누구나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自我의 존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바 삼만육천장의 사진 가운데서 어느 한 장을 집어 들고 이 사진만은 틀림없는 내 사진이라고 주장 할만한 사진 한 장을 골라 낼 수 가 있을까? 불변왈진(不變曰眞)라 변치 않는 것을 眞이라고 하면 시시각각으로 변전(變轉)해 가는 나의 일생 가운데서 자신의 眞假를 따져 볼 때에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떠한 모양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 [내] 가 과연 틀림없는 참 나라고 인정해야 될 것인가?
그 다음 정신상으로 자아의 존재를 분석해 볼 때에 보통 우리의 정신은 知,情,意 삼방면으로 발달해 간다고 볼 수 있다.

첫째, 理知的 방면으로 발달되는 우리의 관념은 항상 사물에 대한 眞假와 허실을 탐구(探求)하며 知의 세계에서 미지(未知)의 세계로 전진 노력을 계속 하지마는 연령의 고하(高下)와 지식(知識)의 심천(深淺)에 따라서 항상 차이점을 발견하므로 언제나 일정하다고는 볼 수 없다.
소년시대에 옳다고 생각하던 것이 청년 시대에 와서  잘못됨을 깨닫게 되고, 청년시대 정당하다고 주장하던 사상이 노년에 이르러 그릇됨을 뉘우치게 되는 일이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비일비재(非一非再)로 체험해 보는바가 아닌가, 그러므로 그 결과에 있어서는 일정불변한 참다운 진리를 발견하기는 심히 어려운 일로 생각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감정적(感情的)방면으로 발달되는 情念은 주위의 환경에 부딪칠 때에 누구나 희노애락(喜怒哀樂) 등의 모든 감정을 부리게 되는데 [笑中有刀 ]라 웃음 가운데 칼이 있다는 말과 같이 과연 이 기쁨과 성냄과 슬픔과 즐거움이란 얼마만큼 자아의 진실성을 표현하는 감정의 발로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일시적 기쁨은 잠시 후에 슬픔으로 변해 버리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노발대발 하던 분노의 감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별안간 회한(悔恨)의 눈물을 흘리며 회과자책(悔過自責)하는 광경을 나타나게 되니 과연 어떠한 감정의 발로(發露)가 올바른 감정이며 진실한 自我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지 알 수가 있는가?
셋째, 意識的방면으로 발달되는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은 주로 시비, 선악을 판단하여 옳은 것은 좇고, 그른 것은 배척하며 악한 것은 버리고, 선한 것은 행해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마는 우리 인간은 어찌하여 옳은 일보다 그른 일을 많이 하며 착한 일보다 나쁜 죄를 더욱 많이 짓게 되는지 언제나 자기모순(自己矛盾)의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지 않느냐?
때로는 善心이 발동하여 [착한 나]라고 스스로 자아의 행동을 발견 할 때도 있지 않는가? 그러면 어떤 것이 眞我냐, 만일 [착한 내가] [참나] 라고 하면 왜 변해서 [악한 내]가 되며 또 [악한 내]가 [참 나]라고 하면 왜 다시 변하여 [착한 내]가 되는가?  변하는 것은 [참나 ]가 아니라고 한다면 [착한 나] [악한 나]가 모두 [참나]가 아닐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하면 대관절 [참나]라고 하는 것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있다고 하면 어디 있으며 어떻게 생긴 것이 [참나]의 모습이냐?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범부들이 實我라고 집착하고 있는 자아(自我)의 존재(存在)를 불교에서는 妄我나 小我 또는 假我라고 지칭하여 배척하는 동시에 實我에 집착하고 있는 미혹한 범부 중생에게 전미개오(轉迷開悟)하여 妄我나 小我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고 自我의 존재가 결국 일시적 인연의 假合으로 된 假我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킴으로서 한걸음 나아가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쳐 알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무아의 진리를 깨쳐 알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반야심경에서 말씀한 색즉시공 [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원리를 깨치지 않고는 불가능 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범부는 물론이요, 대소승(大, 小乘)의 성자(聖者)까지도 妄我나 小我에 대한 人無我(사람은 일정한 我가 없음)의 원리를 깨쳐서 아집(我執)을 버리고 아공을 얻게 하며 따라서 自我의 존재는 물론이요, 自我의 밖에 있는 모든 만유제법(萬有諸法)까지도 실지로는 일시적 인연의 假合에 불과하므로 法無我(법은 일정한 아가 없음)의 원리를 깨쳐 법집(法執)을 버리고 법공(法空)을 얻게 된다.
인생은 물론이요, 우주만법이 일시적 인연의 가합인 가유(假有)의 현상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假有의 현상까지도 결국은 空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人無我, 法無我 즉 我空, 法空의 원리를 통달하게 됨으로써 구경열반(究竟涅槃)에 도달하여 비로소 법신, 반야, 해탈(法身, 般若, 解脫)의 삼덕이 구족한 眞我의 본체를 발견하게 된다.
마치 구름이 흩어짐에 밝은 달이 드러나는 것과 같이 妄我의 껍질을 벗어 버리면 眞我의 묘체(妙體)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본디 생멸(生滅)이 없고 구정(垢淨)이 없고 증감(增感)이 없는 진아의 묘체인 영지각성은 우리 범부의 자성 가운데 언제나 불변불리(不變不異)하고 허령불매(虛靈不昧)하며 상주불멸(常住不滅)하고 있지만 오직 망아나 소아의 탐욕에 사로잡혀 자성의 심월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문(佛門)에 들어와 아공, 법공(我空, 法空)을 수행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실상을 증득하게 되면 이에 반야공지(般若空智)의 광명으로 자성의 심월을 비추어 眞我의 妙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망아(妄我)나 소아(小我)로서 탐욕의 생활을 주로 하는 범부 소인들은 오직 이기주의(利己主義)로서 남을 해치고 남을 죽이며 심지어 국가와 민족을 팔아서라도 자기의 사욕을 만족시키는 향락생활을 도모하지마는, 진아(眞我)를 발견한 각자(覺者)의 경계에 도달하게 되면 범부 소인의 행동과는 정반대로 오직 이타자비(利他慈悲)로서 남을 사랑하고 남을 동정하며 심지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국가민족과 세계인류를 위하여 진심 전력 하는 것이 각자(覺者)의 행동이라 할 것이다.
각자(覺者) 자신으로 말하면 이미 우주의 만유(萬有)가 허망무실(虛妄無實)하여 일체가 다 공(空)한 이치를 깨치고 보매 물심(物心)을 초월하여 한물건도 걸림이 없는 무애해탈지(無碍解脫智)를 얻는 까닭에 자유자재한 심신의 능력으로서 생사의 고해(苦海)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야공지(般若空智)의 광명을 얻은 각자(覺者)의 혜안(慧眼)으로서 고해의 중생을 살펴보매, 무지한 중생들이 무명(無明)의 탈을 쓰고 망아, 소아의 포로(捕虜)가 되어서 서로 죽이고 서로 빼앗으며 갖은 죄악을 짓고 있는 모양이 흡사 하루살이와 불나방 같은 여름벌레들이 불빛으로 잘못 알고 불속에 뛰어들어 몸을 태워 죽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음을 보고 자비심을 일으켜 화택중생(火宅衆生)을 제도하는 것이다.
육조대사(六祖大師)는 말씀하시되 [심각왈불(心覺曰佛)이요, 심정왈법(心正曰法)이요, 심청정왈승(心淸淨曰僧)이라] 하였고 또 이르되 [누구든지 자비심을 가지면 관세음보살이요, 희사심(喜捨心)을 가지면 대세지보살이요, 능인정묵(能仁靜黙)하면 석가모니불이요, 평등심직(平等心直)하면 아미타불이 될 수 있으니 내 마음 밖에 따로 부처를 구하지 말라] 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망아(妄我)를 버리고 眞我를 찾는다고 해서 망아를 아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小我의 소심(小心)만 버리면 소아(小我) 그대로 대아(大我)가 되는 것이요, 망아(妄我)의 망심(妄心)만 버리면 망아 그대로 진아(眞我)가 되는 것이니 누구든지 마음 하나만 깨치면 중생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내 자신을 아는 것 이상 더 큰 일은 없다.
우리는 하루 빨리 반야공(般若空)의 진리를 연구하여 자성(自性)의 부처를 찾음으로서 자기의 인격을 완성시키는 동시에 자비심(慈悲心), 평등지(平等智), 자재력(自在力)을 구족하여 인류구제에 이바지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